[나우누리][버터빵] 소. 개. 팅. (7918/37592)

추억의 유가촌(유머가 가득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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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촌 레전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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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안, 나우누리... 추억의 그 시절에 대한 회상 . . . 유가촌 (유머가 가득한 마을), 푸하, 모뎀 인터넷 시절. . .

이제는 인터넷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보기 힘들어진  그 시절 세상 살던 이야기를 AV툰모아에서 들려드립니다.

 

[나우누리][버터빵] 소. 개. 팅. (7918/37592)

포럼마니아 1 7,096

- Prologue -


" 퉤~! "

하얀 거품과 함께 붉은 피가 섞인 침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뱉은
침에서는, 더욱 많은 피가 배여 있었다. 그는 입 안에 있던 것을 꺼내고, 입을
한번 스윽 닦은 후, 살기어린 눈으로 그의 앞에 서있는 사람을 보았다.

" 야, 이 새꺄!! 이 닦는데 웃기지 말랬지!! "

" 누가 그렇게 웃을 줄 알았나 뭐. "

" 암튼! "



< 1 >

모든 것은 CIH 바이러스 때문이었다.

친구의 컴퓨터가 CIH 바이러스 먹어서 하드가 날아간 것도, 그래서 고쳐주러
간 것도, 6시간동안 고생고생해서 고쳐주고 났더니 이 녀석이 사준다던 밥은
안사주고 슬며시 전화번호를 건낸 것도, 그 전화번호로 연락을 했더니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나온 것도, 그리고 내 친구가 자기 소개팅 시켜줄 남자한테
자기 전화번호를 주기로 했다는 것도, 그리고 여차저차 하여 오늘 만날 약속을
한 것도, 그리고 아침에 이를 닦다가 동생이 뒤에서 웃기는 바람에 치솔을 콱
밀어넣어 입에서 피가 난 것도...

모두 CIH 바이러스 때문이었다.

약속시간은 오후 1시. 만나는 장소는 신천. 서로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도착하면 전화를 하기로 했었다. 떨리는 마음.

' 후... 1년 반 만의 소개팅인가... '

버스를 타고 약속장소로 가면서, 감회가 새로왔다. 재수할 무렵, 대학교
들어가면 미팅이고 소개팅이고 닥치는 대로 하는 카사노바가 되리라! 라고
마음먹었었는데, 연애할 때는 절대 다른 여자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원칙
덕분에 실제로 미팅 소개팅 한 횟수는 채 10번이 되질 않았다.

워낙 오랜만에 하는 소개팅이니 긴장이 아니될 수 없었다. 더욱이 주선 없이
만나는 007 팅인데다가, 더더욱이 친구 왈,

" 걔 내가 아는 애 중에서 제일 이쁜 애야! 잘 되면 네가 한턱 내! "

라는 말을 들은 이상, 긴장을 안하면 그게 사람인가 어디.

그래서 좀 신경을 썼다. 옷도 며칠 전부터 다려놓은 빨간 남방에, 바지도 LEE
( 절대 REE 가 아니다. 이런 날엔 짜가를 입을수 없지! ) 청바지에, 키가 좀
커보이려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다. 그리고 말빨도 점검해보기위해 생전
안가던 대화방에도 들어가서 이방 기웃, 저방 기웃, 대화에 낄려고 안간힘을
써보기도 했다. 결과는?

은따, 왕따가 되어버린 내 자신을 발견하면서, 대화방에 너무 안와봐서
분위기를 파악 못해서 그렇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도 엄청나게 늘어나버린
불안감+초조+긴장+자신감 결여를 회복해 주지는 못했다.

' 도대체 왜 이 얘기가 재미 없는거지? 싸이클 제일 못타는 사람이
못타싸이클이라는데, 왜 재미가 없는거지? '

하지만...솔직히.. 재미 없다. 음하하.

그리고 버스에서 내려 약속장소인 교회 앞으로 갔다. 수 많은 사람들. 모두
어떤 사람을 기다리는 듯 한 표정들. 전형적인 바보 스테이지. 나도 또 하나의
바보가 되어 여기에 섰다.

소개팅을 나가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소개팅에서 가장 긴장되는 시간이
약속시간 5분 전부터 5분 후까지이다. 이 시간동안 약속장소로 오는 모든
이성들의 모습에 대하여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도, 기쁨에 겨워 행복해 하는
느낌도, 오늘 하루 망했다는 느낌도, 주선을 죽여버리겠다는 느낌도, 이
사람이라면 해 볼만 하겠다는 느낌도, 배고프다는 느낌도, 과연 1999년 8월에
지구가 망할까 하는 느낌도... 생사를 초월하여 극락에서 나락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확실하게 느끼도록 해
주는 것은 소개팅 외에는 그리 많지 않다.

' 뜨아~!! 제발 저 여자는 아니기를! 안돼~!! '

' 헥헥.. 저 여자는 아니구나. 헉.. 저 여자가 핸드폰을 꺼내내? 혹시 저
여자? 윽.. 내가 젤루 싫어하는 스타일. 안돼! 내 핸드폰이 울리면 안돼!! '

' 휴.. 아직은 아니구나. 어.. 와! 저 여자 장난 아니게 괜찮다! 혹시 저
여자가? 그래. 얼굴이 하얗다고 했으니까 저 여자일지도 몰라. 와라! 그래!
어서 달려와 내 품에 안겨버리는거야!! 아자! '

' 제...젠장.. 내 옆에 서있던 멀뚱한 놈과 애인관계였다니.. 차라리 소개팅
때려치우고 저 여자 헌팅을... '

"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띠 리리리리 리리리~ "

온갖 잡다한 원맨쇼틱 씽킹( Thinking like One-Man-Show )을 하며 긴장의
극에 달해있을 순간, 바보 스테이지를 우렁차게 울리는 군밤타령 소리.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맥스웰 선전에 나오는 김민종의 비참함이
뼈저리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가라.

" 여..여보세요? "

" 네, 저기요.. 오늘 약속한 앤데요.. 제가 좀 늦을 것 같거든요? 미리 어디
까페 가서 기다리고 계실래요? "

" 그래요 그럼. 저기, 우리 만나기로 한 교회 앞에 마이 커피라는 커피숍이
있는데, 그리로 오세요. 아 참, 저 빨간 남방에 안경은 하얀거 쓰고 있으니깐
찾으실 수 있을꺼에요. "

" 네, 죄송합니다. 그럼 잠시 후에 뵐께요. "

삑.

한 고비가 건너갔다.



< 2 >

후회스러웠다.

하필 이 커피숍을 고르게 된 것은 신의 장난이었단 말인가.

어떻게.. 어떻게...

같은 커피숍에 빨간 남방을 입은 남자가 4명이 앉아있으며, 그 중 한명은 잘
팔지도 않는 하얀 안경을 쓰고 있단 말인가!!!

구석탱이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쪽쪽 빨면서, 나는 괴로워했다. 이 난국을
어떻게 해결할까나.

그래, 행동으로 나가는거야. 이 커피숍에 빨간 남방을 입은 남자는 나뿐이여만
해!!!

- 상상 중 -

터빵: 저..

남1: 네?

터빵: 혹시 애인 있으신가요?

남1: 그..그게.. 네.. 뭐..그런 셈인데요.

터빵: 행복하시죠?

남1: 네.

터빵: 근데, 벤담 아세요?

남1: 반담이요? 장 끌로드 반담?

터빵: 베에엔다아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남1: 들어본 건 같은데.. 왜요?

터빵: 행복하다면, 남의 행복도 고려해주시는게 도리겠죠?

남1: 뭐..그렇지만..

터빵: 만약 제 행복을 고려해 주신다면, 지금 그 옷을 벗어!!!

" 켁! "

쪽쪽 빨던 커피가 넘어왔다. 상상만 해도 내가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몰라. 인연이 닿으면 잘 찾아 오겠지.

사람을 기다리다보면 온갖 실없는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하염없이 창 밖을 보았다.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아이와 헤어진 지 1달이 채 못되어서,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별의 아픔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헤어지고 울지도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까지 잘 버텨왔다는 사실 때문에,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짜피 그녀도 나를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나처럼 이렇게 소개팅이
나갔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 때문에,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해를 가리는 구름이 차라리 고마웠다.



< 3 >

그녀와 헤어지게 된 건 1달이 채 못된 일이었다.

서로 좋아하는 마음 여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러가지 주변 상황이 안좋게
돌아가는 바람에 헤어지기로 결정했었다. 여러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것에 약한 그녀로서는, 자꾸 만나자고 조르는 나를 힘겨워했었다.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답답하기도 했다.

헤어지게 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그녀가 얼마후 외국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것. 그런데 그 원인이, 자기가 나가고 싶어서 나간다는 것. 자신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나는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자신이 없었으니까. 내가 3년 동안
그녀에게 외국에 나가는 것 보다 더 나은 조건을 제공할 수 없었으니까.

서로 좋아하는데 왜 헤어지냐는 말을 들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해하지는 않는다. 단지 적응하고
있을 뿐. 이해하지 못해도, 적응 할 수는 있다.

그런데 나도 놀란 사실은, 헤어지고 나서 너무 무덤덤했다는 사실이었다.
좋아했는데, 지금도 좋아하는데, 분명히 많이 슬플 것 같았는데, 너무도
무덤덤하게 이별이 다가왔다. 난 눈물이 많은 아이라, 헤어지고 나면
며칠동안이라도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눈물이 흐르곤 했는데.. 이번 이별은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나도 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과연 내가 정말
좋아했던 걸까.

덕분에 친구들에게 정상적인 모습을 보였고, 덕분에 소개팅을 시켜준다는
제안까지 들은 것 같다. 이별에 너무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소개팅을
시켜준다면, 그건 헤어진 아이의 대리를 만들어 주는 것밖에 안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녀석이 아니니까.

그리고 나도 잊은 줄 알았다. 1달만에. 나도 내가 그렇게 냉정해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 4 >

" 죄송해요. 너무 늦었죠? 오래 기다리셨어요? "

" 아뇨. 괜찮습니다. 어서 앉으세요. "

" 휴.. 차가 많이 막히네요. 날씨도 좀 더워서.. "

" 땀 좀 닦으세요. 천천히 오셨어도 되는데. "

" 뭘요. 빨리 와야죠. "

" 저 근데.. 죄송해서 어떡하죠... "

" 네? "

" 저.. 저.. 정말 죄송한데요.... 실은... 저.. 늦은 것 때문은 정말
아닌데요.. 무슨 일이 그 동안 생겨서, 기분이 엉망이 되어버렸거든요. 지금
상태로는 재미있게 이야기 못할 것 같아서.. 죄송해요. "

황당해 하는 그녀를 말도 안되는 이유로 설득시키고, 미안한 마음에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다.

내 생일날 그녀가 밤을 새며 만들어준 갈색 호두케익, 평생 간직하겠다고 작은
덩어리를 잘라 냉동실에 넣어놓은 케익을 꺼내 먹으며...

그 동안 내가 슬프지 않았던 이유는,

아직 이별을 실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아직 내가 그녀를 잊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 Epilogue -


" 흥~! "

투명한 액체와 함께 붉은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떨어진 액체에는
노오란 건더기도 들어있었다. 그는 살기어린 눈으로 그의 앞에 서있는 사람을
보았다.

" 야, 이 새꺄!! 코 파는데 웃기지 말랬지!! "

" 누가 그렇게 웃을 줄 알았나 뭐. "

" 암튼! "



< 끝 >



추신: 제 글들을 모은 책이 나옵니다. 5월 12일 정도에 서점에서 찾아보실 수
있다고 하네요. 제목은 " 그녀는 버터빵을 모른다고 대답했다. " 입니다.
혹시라도 시간 남아도시고 돈 넘쳐나시는 분들은, 한 권 사 보세요. 제 돌
사진도 들어있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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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AVgirl쭈리❤️ 21-10-28 22:11
과거는 갔고. 미래는 몰라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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